벽화
국립박물관 입구 양쪽에는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두 개의 거대한 벽화가 이태리산 유리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벽화는 다툭 총 라이 통(Datuk Cheong Lai Tong)이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이 주최한 응모전에서 수상한 후 1962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동쪽 벽화의 제목은 ‘말라얀 역사의 장면들’이고, 서쪽 벽화는 ‘말라얀 공예품들과 장인’입니다. 제목에 ‘말레이시아’가 아니라 ‘말라얀(Malayan)’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말레이시아’라는 국가 명칭은 이 작품이 만들어진 이후인 1963년에야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서쪽 벽화는 말레이시아의 문화를 보여주는 공예품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맨 왼쪽 그림은 베틀로 송켓(songket)이라는 전통 직물을 짜는 모습입니다. 송켓은 실크나 면직물을 짤 때, 금실이나 은실을 넣어 모티브를 만드는 전통 직물로, 13~14세기 경 뜨릉가누(Terengganu_말레이 반도 북동부 주)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옆으로는 판단 잎(pandan_길쭉한 모양의 열대 식물 잎)이나 대나무, 라탄으로 바구니, 가방, 매트를 짜는 모습이 보입니다.
다음은 금속 공예품들을 만드는 모습입니다. 먼저, 두 사람이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서 크리스(keris_전통 말레이 단검)와 황동 징을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를 만드는 일은 매우 신성한 예술 작업입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은세공인이 작업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 명은 은을 녹이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장신구, 찻주전자, 꽃병 같은 것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갤러리 A : 선사시대
고대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문화가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문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했지만, 공동체 의식과 모험심, 영적인 것에 대한 탐구, 타고난 적응력과 호기심 같은 기본 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동굴 벽화

전 세계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선사시대 유물은 동굴 벽화입니다. 동굴 벽화는 초기 인류의 생활 방식과 사고 과정, 그리고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타임 캡슐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는 페락(Perak_말레이 반도 북서부 주)의 탐분 동굴(Gua Tambun)과 사라왁(Sarawak_보르네오 섬 북서부 주) 니아(Niah)의 카인 히땀 동굴(Gua Kain Hitam)에서 발견되었습니다.약 2천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동물들, 기하학적 디자인과 상징적인 배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좀 더 최근의 동굴 벽화는 페락 릉공(Lenggong)의 바닥 동굴(Gua Badak)의 것으로, 오랑 아슬리(Orang Asli_말레이시아 토착민) 사람들이 영국 식민 시기의 생활을 그린 것입니다. 남녀로 구성된 그룹이 모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동굴 벽화도 있습니다. 동굴 벽화에 쓰인 빨간색 안료는 적철광이며, 검은색 안료는 숯입니다.
동굴 벽화는 여러 가지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굴 벽화는 초기 인류가 추상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페락 탐분 동굴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에는 사슴과 듀공(dugong_바다에 사는 포유류)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그 당시 살았던 동물들과 사냥했던 사냥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굴 벽화는 또한 자연 숭배, 성공적인 사냥이나 풍성한 수확에 대한 기원,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의식이나 관행의 일부였을 수 있으며, 이는 초기 인류가 애니미즘이나 초자연적 현상 혹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정말 단순히 누군가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선 북(Dongson drum)

현재 330가구가 살고 있는 북부 베트남 탄호아(Thanh Hoa)성의 동선(Dongson) 마을은 동남아시아에 퍼진 동선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동선 문화는 기원전 1천년 중반~기원후 3세기까지 존재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선 북이 있습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선 북은 필리핀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었는데, 북 중앙에 볼록한 별 모양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별에는 보통 8~16개의 짝수 빛살이 있으며, 별 이외에도 사슴, 버팔로, 새와 같은 동물들이나 다양한 형태의 사람 모습, 기하학적 디자인의 장식들이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동선 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무역을 통해서 서로 교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역은 여러 강들을 통해 동남아시아 본토에서 말레이 반도까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슬랑오(Selangor_말레이 반도 중서부 주), 파항(Pahang_말레이 반도 중동부 주), 뜨릉가누의 여러 지역에서 8개의 동선 북이 발견되었습니다.
동선 북은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부유한 사람만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소유자가 죽으면 주인과 같이 묻히거나, 후손이 가문의 가보로 물려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축제나 종교적 의식에서 조상의 영혼을 소환하거나, 바위와 나무에 사는 자연의 정령을 달래기 위해, 기우제 춤을 출 때, 혹은 전쟁 중에 사용되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든 동선 북의 아름다움과 독특함은 수세기 동안 잘 보존되어 왔으며, 동선 문화를 대표하는 유형 유물로써 당시의 문화와 사회 경제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거석(Megaliths)

거석은 거대한 바위 판으로 만든 구조물로, 단독으로 또는 다른 바위들과 무리를 지어 서 있습니다. 동굴 벽화와 마찬가지로 거석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펭칼란 끔빠스(Pengkalan Kempas) 거석 유적지는 느그리슴빌란(Negri Sembilan_말레이 반도 중서부 주)의 링기(Linggi)에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이 거석들을 ‘살아있는 돌’로 부릅니다. 매년 1~2인치씩 자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사실은 토양 침식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석의 맨 아래 부분에 있는 흙이 바람이나 빗물에 쓸려 나가면서 땅에 묻혀있던 거석이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이 거석들은 총3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생김새에 따라 방향타(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숟가락, 검이라고 불립니다. 방향타 거석에는 말로 추정되는 네 발 달린 동물과 공작으로 보이는 새의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윗부분은 코끼리 코 아니면 연꽃 줄기처럼 보입니다. 검 거석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하늘을 향해 솟은 형태입니다. 검 거석 상단에는 ‘알라(Allah)’라는 아랍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나중에 ‘알라’라는 단어를 추가해서 힌두교적인 거석을 이슬람적인 것으로 신성하게 만든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검 거석의 중간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모티브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혀를 내민 얼굴이거나, 비슈누(Vishnu_힌두교의 신), 칼라(Kala_힌두교의 신화적 동물)의 머리, 혹은 링감(lingam_힌두교 시바신의 남성적 창조 에너지를 상징)과 같은 힌두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숟가락 거석은 특별한 장식은 없지만, 그 모양이 요니(Yoni_시바신의 아내 샤크티의 여성적 재생 에너지를 상징)와 비슷하기 때문에 링감 모양을 한 검 거석 옆에 놓여진 것일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슬람, 힌두교 모티브들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조각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한 지역에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이 공존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아마도 외국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역을 하러 온 상인들이 가져온 종교와 신념, 관습들은 토착 신앙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특한 혼합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거석들은 15세기 성인(saint) 아흐마드 마자누(Ahmad Majanu)의 무덤이 있는 초기 이슬람 무덤 단지 안에 있습니다. 원래의 목적과 제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역 공동체가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였을 수 있습니다. 또한 축하 행사나 죽음을 애도하는, 혹은 무언가를 기원하는 의식을 위해 모이는 장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더 많지만, 인간이 의미와 공동체 의식을 추구하고, 종교적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이 오래된 거석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다굽타 비석(Buddhagupta Stone)

문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화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는 정보와 아이디어를 전파하고, 역사와 사건을 기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의사 소통의 수단입니다. 각 지역은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고유한 문자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동남아시아의 문자는 인도나 중국보다 늦었습니다. 아직 자체의 문자가 없는 지역의 문화는 무역을 통해 다른 나라의 문자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그 예가 바로 부다굽타 비석입니다. 이 비석은 1834년, 제임스 로우(James Low) 선장이 페낭(Penang_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북서부 일부를 포함하는 주)의 스브랑 쁘라이(Seberang Prai)에서 발견했습니다. 박물관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며, 원본은 인도 콜카타(Kolkata)에 있는 박물관에 있습니다.
부다굽타 비석은 마하나비카 부다굽타(Mahanavika Buddhagupta)가 이 지역의 사원에 기증한 것입니다. 부다굽타는 4세기경에 살았던 불교 신자이자, 항해자로 말레이 반도 북부를 방문했습니다. 비석에는 카르마(karma_업보)에 관한 구절과 성공적인 항해에 대한 감사의 글이 팔라바(Pallava script_남인도의 고대 문자) 문자를 사용한 산스크리트어(Sanskrit_고대 인도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7세기 이전까지는 말레이어를 기록하는 문자 체계가 없었지만, 이후 외국 상인 및 여행자들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팔라바 문자로 말레이어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카위(Kawi)나 릉콩(Rencong)같은 이 지역 버전의 문자들이 개발되어 13세기 초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세계와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말레이 문자는 팔라바, 카위, 릉콩 문자에서 벗어나 점차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Quran)은 아랍 문자로 쓰여있는데, 종교적 문구들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자위(Jawi) 문자가 도입되었습니다. 자위 문자는 아랍 문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말레이어의 발음을 반영하여 6개의 문자가 추가되었습니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말레이어와 자위 문자는 이 지역의 링구아 프랑카 (lingua franca_공통어)가 되었으며, 지배자 계층과 관리들부터 평민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이 믈라카(Melaka)를 정복하면서 자위 문자의 사용은 줄어들었습니다. 언제부터 로마자가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1516년에 말레이어가 로마자로 표기된 기록이 있습니다. 말레이어는 이후 여러 식민 세력들이 서로 다른 철자 체계(말라야의 경우 Wilkinson, 인도네시아의 경우 van Ophuijsen)를 도입하면서 변화했습니다. 말레이 학자 자이날 아비딘 아흐마드(Zainal Abidin Ahmad)는 1936년에 말레이어 문법 책인 “펠리타 바하사(Pelita Bahasa)를 출판하여 말레이어를 현대화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쿠알라 슬린싱(Kuala Selinsing)

쿠알라 슬린싱 정착지는 부장 밸리(Bujang Valley_4~14세기 말레이 반도 북서부 해안에 있었던 국제 무역 중심지)문명과 동시에 존재했던 지역공동체로, 1928년 고고학자 I.H.N 에반스(I.H.N. Evans)가 처음 발굴했습니다. 위치는 슬린싱 강(말레이 반도 북서부 해안) 어귀의 맹그로브 습지 주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원 전 1세기~기원 후 10세기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집들은 갯벌 위 기둥을 박고, 그 위에 나무와 짚으로 만들었습니다. 정착지의 위치는 조개껍데기와 흙이 섞인 무더기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정착민들이 버린 쓰레기가 쌓인 것이었습니다.
발굴 작업을 통해 쿠알라 슬린싱 정착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준보석과 유리로 만든 비즈들, 유약을 바른 그릇들, 소라 껍질, 토기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구멍을 뚫지 않은, 혹은 부분적으로 뚫린 비즈들과 색깔이 있는 유리 덩어리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연구자들은 이 곳에서 비즈들이 생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쿠알라 슬린싱 정착지는 레진(resin_나무에서 나오는 끈끈한 진)과 같이 내륙에서 채집한 제품들을 공급하는 항구 역할을 했을 수도 있으며, 부장 밸리는 쿠알라 슬린싱에서 만든 비즈들을 수출하는 중계항 역할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발굴된 심해어의 뼈들은 쿠알라 슬린싱 정착민들이 뱃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연구자들은 쿠알라 슬린싱 주민들이 힌두-불교를 믿는 부장 밸리와 교류하면서도, 애니미즘을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굴된 무덤들에서는 똑바로 눕혀진 자세의 유골과 비즈, 토기, 돌 장신구, 음식 같은 부장품들이 발견되었으며, 후대에도 시신은 예를 갖추어 매장되었습니다.
쿠알라 슬린싱은 1,200년 간의 거주 이후 버려진 것으로 보이며, 경제적, 지리적 요인들로 인해 사람들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매장과 장례 (Burials)
“죽음과 세금 말고 확실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죽음은 애도와 슬픔의 시간이지만, 고인에게는 영혼의 세계로 떠나는 여정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는 선사 시대부터 내려온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의식과 의례가 있습니다.
장례용품이나 부장품을 사용하는 매장 의식은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약 1만년 전 선사 시대 무덤에서 부장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내세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망한 사람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과 함께 묻힙니다. 페락맨(Perak Man_페락에서 발견된 후기 구석기 유골)은 돌 도구들, 조개껍데기, 음식과 함께 묻혔으며, 버남 밸리(Bernam Valley) 석판 무덤에서는 비즈들, 유리와 철 도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부장품들은 사망한 이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보다 정교한 부장품들이 발견된 무덤은 높은 계층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니아 동굴에서 발견된 선사 시대 무덤은 기원전 10,000~5,500년 사이에 매장 방식이 발전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변화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적절한 장례에 관한 문화적 태도가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마다 사망자를 특정한 장소에 모아 매장한 것을 볼 때, 이 시기에 조상의 개념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석기 시대 이전의 유골들은 주로 웅크린 자세로 발견되었습니다. 옆으로 눕거나, 등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가슴까지 굽힌 자세는 신석기 시대 이전까지 동남아시아에서 흔한 매장 관습이었습니다. 페락의 하리마우 동굴(Gua Harimau)에서 발견된 똑바로 누운 유골은 초기 신석기 시대의 것입니다. 왜 매장할 때의 자세가 다른지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지만, 사회적 지위, 나이, 성별, 그리고 다른 문화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말레이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석판 무덤, 통나무 무덤, 항아리 무덤, 동선 무덤과 같은 무덤 형태가 발견되었습니다.

-동선 무덤 : 슬랑오의 깜풍 숭가이 랑(Kampung Sungai Lang)에서 발견된 동선 무덤은 말레이시아의 청동기 시대(기원전 6세기~기원후2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베트남 북부 동선에서 유래된 2개의 동선 북이 토기, 유리, 비즈 같은 부장품들 사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매장은 말레이시아에서만 발견된 것입니다. 무덤을 덮고 있는 나무 판자의 재질이 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나무와 비슷한 것을 볼 때, 보트 매장(실제 배나 배모양 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석판 무덤 : 석판 무덤들은 페락 버남 밸리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가공하지 않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철기 시대(3세기~14세기)에 버남 강 근처 지역에 살았던 공동체의 지배 계층을 위한 매장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기슭에서 화강암을 채취해서 하류의 매장지까지 운반하고,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리, 비즈, 철기와 같은 부장품들이 무덤 안팎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통나무 관 매장 : 통나무 관들은 사바(Sabah_보르네오 섬 북동부 주)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통나무 관들은 벨리안(Belian)이나 멀바우(Merbau)같은 현지 열대 우림의 단단한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약 1,100년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통나무 관들 역시 지배 계층을 매장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관의 손잡이는 뱀, 버팔로, 악어, 새 머리 등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무기와 음식과 같은 부장품이 통나무 관 주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항아리 매장 : 항아리 매장은 시신을 먼저 다른 장소에서 부패시킨 후, 남은 유골들을 항아리에 넣는 2차 매장 풍습으로 주로 보르네오 섬에서 행해졌습니다. 니아 동굴에서 발견된 항아리들은 금속 시대의 것이었습니다. 항아리들은 현지에서 만들어진 테라코타(terracotta _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토기) 항아리였지만 나중에는 마르타반(martaban_미얀마의 항구 이름에서 유래. 주로 항해하는 상인들의 저장 용기로 사용)이나 중국 항아리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갤러리 B : 말레이 왕국들
기원후 2세기에 말레이 왕국들이 생겨난 것은 이 지역의 문화적 환경을 조성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말레이 왕국들은 보르네오, 자바, 술라웨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군도, 인도차이나 일부 지역까지 포괄하며, 중국, 인도와 무역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왕국들은 대제국으로 성장하며 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 갤러리의 상당 부분은 이 지역의 현재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한15세기 믈라카 왕국 시기의 영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레이 왕국들의 신앙, 축제와 오락, 관습과 전통은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세툴 문(Pintu Setul)

여러분은 120년 된 세툴 문을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티크(teak) 패널은 말레이시아 북부 끄다(Kedah) 주에 인접한 태국 남부 세툴 궁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세툴이 아직 끄다 술탄국에 속해 있었던 시기(1843~1909년)에 만들어졌습니다. 패널에는 이 지역의 풍부한 문화 유산과 왕실 전통을 상징하는 말레이와 자바 디자인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문 전체는 꽃 모티브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슬람 예술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형상보다는 꽃과 식물, 기하학적 디자인, 캘리그래피를 모티브로 사용합니다.
세툴 문 위의 조각들은 고대 전통을 계승해서 더욱 풍부해진 문화 유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숙련된 현지 장인들은 힌두-불교 문명, 이슬람 예술 그리고 식민지 영향이 다양하게 혼합된 매혹적인 조각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장인들은 나무를 잘라 세심하게 디자인한 후, 모티브를 조각하는데, 이때 조각은 나무 표면에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투각이라고 해서 나무 전체를 뚫는 방법도 있습니다. 투각 기법은 나무뿐 아니라 석재, 금속, 상아를 이용한 공예에서도 사용되는데, 아름다운 장식의 역할을 하면서도 충분한 햇살을 실내 공간으로 들어오게 하거나, 약간의 그늘을 만들어주는 스크린 같은 실용적인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화려한 공예 기술은 이 지역의 장인정신과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목공 예술은 현재에도 페낭과 같은 지역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중국계 장인들은 여전히 나무를 이용해서 간판이나 조상들의 위패, 가구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목공 예술에 사용되는 모티브들은 그 공동체의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전통 예술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용머리(Dragon Head)

세툴 문을 지나면 갤러리 왼쪽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용머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용머리는 100년이 넘은 것으로, 19세기 후반 파항의 왕족이 소유한 전통 배의 뱃머리로 사용되었습니다. 잭푸룻(jackfruit) 나무를 정교하게 조각하여 용 머리를 형상화하였으며, 생동감 있는 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섬세하게 얽혀 있는 콩 덩굴 조각은 수준 높은 장인정신을 보여줍니다. 해상 무역이 경제와 문화에 필수적이었던 스리비자야(Srivijaya)와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에서는 이 용머리가 선원들의 항해를 보호하고 인도한다고 믿었습니다.
용은 말레이 왕국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삶과 신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대 말레이 문화는 힌두교와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용은 나가(naga)로 불리며, 물이나 동굴에 사는 커다란 뱀이나 용 같이 생긴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나가는 흔히 다산, 보호, 지혜, 길조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파항 주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조용한 치니(Chini) 호수에는 스리 구멈(Sri Gumum)이라는 나가가 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스리 구멈은 이 지역의 식물과 동물을 보호하고, 침몰한 고대 왕국(한때 번영했으나 신의 노여움을 사 호수에 잠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치니 호수의 전설은 오랑 아슬리(말레이시아 토착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전설은 오랑 아슬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강력한 유대감과 자연 숭배(자연에 깃든 정령을 믿는 것) 신앙을 보여줍니다. 인도차이나의 다른 지역에도 마찬가지로 용의 영적 의미와 상징을 보여주는 전설과 설화들이 있습니다.
기존의 믿음과 신앙은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변경되었으며, 동물과 인간의 형상 대신 꽃 모티브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용 장식품들은 계속 보존되었으며 상징적으로 존재합니다. 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교나 문화 축제, 해양 행사들에 등장하며, 문화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향신료(Spices)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해상 항로인 믈라카 해협에 위치한 믈라카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5세기에 향신료, 직물, 도자기 무역으로 번성했습니다. 활발한 무역은 믈라카의 다문화적 전통과 문화 유산을 만들었고, 이는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향신료는 여러 무역품들 중에서도 고가의 상품이었으며, 이 지역의 독특한 요리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후추, 계피, 메이스(mace), 정향(clove), 육두구(nutmeg) 등의 다양한 향신료는 상품 가치가 높고, 약이나 향수의 원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향신료는 또한 다양한 요리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각 민족은 서로 다른 향신료들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요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몰려든 외국 상인들로 믈라카는 다문화적 환경이 되었으며, 페라나칸(Peranakan_’현지에서 태어난’이란 의미) 커뮤니티가 만들어졌습니다. 페라나칸은 외국인 남성과 현지 여성의 결혼으로 탄생한 자손들을 말합니다.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이 소수의 혼혈 커뮤니티들은 말레이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자신들만의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바-뇨냐(Baba-Nyonya_중국계 페라나칸) 요리는 강황, 레몬그라스, 갈랑갈(galangal_생강과의 뿌리), 후추 같은 향신료를 사용하며, 허브로 다양한 풍미를 내는 말레이 요리에 중국식 요리 기술을 더해 섬세하고 강렬한 음식들을 만들어냅니다. 가장 대표적인 바바-뇨냐 음식인 아얌 퐁떼(ayam pongteh_콩을 발효시킨 소스에 졸인 닭고기)에는 인삼, 생강, 팔각, 레몬그라스, 계피 등이 풍부히 사용됩니다. 조리 과정은 복잡하지만 맛있는 풍미의 조합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랑 받았습니다.
치티(Chitty_인도계 페라나칸)는 인도 남부 출신의 혼혈 커뮤니티로, 힌두교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말레이와 중국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치티 요리는 남 인도와 말레이 요리의 독특한 조합입니다. 핀당(pindang_염장이나 조미한 생선을 끓이는 요리법)은 레몬그라스, 갈랑갈, 강황 같은 향신료를 고운 페이스트로 만들어 진한 코코넛 크림, 청어 머리와 함께 끓입니다. 습식 향신료(페이스트 형태)를 사용하는 점에서 건식 향신료(가루 형태)들을 섞어 요리하는 인도 요리와 차별화됩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대표적 요리로는 른당(rendang)이 있는데, 고기와 카다멈, 계피, 팔각과 같은 향신료를 코코넛 밀크에 넣고 오랜 시간 천천히 졸이는 요리입니다.
향신료는 아시아의 요리뿐 아니라 건강과 힐링에도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향신료를 사용한 전통 치료법은 아직도 많은 지역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레몬그라스와 정향을 사용한 아로마테라피, 전통 중국 의학, 아유르베다(Ayurvedic) 의학, 인도네시아 전통 의학인 자무(Jamu)등이 있습니다.
말레이 왕국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향신료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습니다. 향신료는 경제를 형성하고, 문화와 사회 구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말레이 왕국들은 향신료 무역을 통해 부를 창출했으며, 믈라카 같은 도시들은 전 세계의 상인, 여행자,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향신료 무역은 이 지역에 해양 제국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문화적 다양성을 만들었습니다. 서로 공존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이 다양성은 현대 동남아시아 사회에도 깊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르밥(Rebab)

말레이 왕국의 모든 지역에는 공동체가 같이 즐기는 음악들이 있습니다. 동서양을 잇는 무역로를 통해 아랍, 중국, 인도의 악기와 전통 음악들이 들어왔습니다. 음악은 오락의 도구이면서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힐링을 경험하게 합니다.
가믈란(gamelan)은 자바에서 시작된 전통 오케스트라입니다. 가믈란에서 사용되는 르밥(rebab)이라는 현악기는 몸통에 달린 두 개의 현에 활을 켜서 연주합니다. 나무, 말총, 버팔로 방광 또는 창자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악기와 화려한 장식 조각은 숙련된 장인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르밥은 말레이시아 동부 해안에서 샤먼이 고대의 전통 치유 의식을 진행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신비스러운 악기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르밥은 태국 남부의 전통 무용극인 막용(Mak Yong)에서 연주되는 주요 악기 중 하나입니다.
막용은 처음에는 애니미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막용은 오락뿐 아니라 종교적 의식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연은 전설적인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 공연의 시작과 마지막에 행해지는 의식 행위, 믕가답 르밥(mengadap rebab)으로 구성됩니다. 믕가답 르밥은 모든 막용 공연에서 행해지는 오프닝 댄스로 르밥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인데, 이때 르밥은 그루(guru_스승), 조상, 특정 신을 상징하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르밥은 감정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환자를 치료하는 치유 공연인 메인 푸테리(Main Puteri _공주 연극)에서도 사용되며, 그림자 공연에서는 반주의 역할뿐 아니라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과 교감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불어넣기도 합니다.
르밥은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왕국들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말레이 문화 유산으로써 종교 의식, 궁정 행사, 대중 공연을 통해 전승되고 있습니다.
크리스(Keris)
크리스는 말레이의 전통 무기로 모든 말레이 남성들은 늘 크리스를 허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왕족, 귀족, 전사가 착용하는 크리스는 소유자의 혈통과 지위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 칼날의 곡선의 숫자는 왕족과 평민에 따라 다릅니다(지위가 높을수록 곡선의 숫자가 많음)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크리스는 9세기 보로부두르(Borobudur_자바의 불교 유적)의 부조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3세기 베트남의 동선 청동 문화가 크리스 제작 기술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말레이 군도 전체로 퍼져나갔고, 크리스에 담긴 철학과 아름다움, 실용성으로 인해 말레이 문명에서 무기 이상의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는 말레이인의 정체성과 존엄을 상징합니다.

이 셀레베스(Celebes_현 인도네시아 섬으로 술라웨시로도 불림)의 로얄 크리스는 물결 모양의 칼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 손잡이는 상아로 만들어졌으며, 손잡이 아래 부분은 구리로 감싸져 있습니다. 칼집의 상단 부분도 역시 상아이며, 금으로 된 칼집 몸통에는 콩 덩굴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전체 길이는 크리스와 칼집을 합쳐 43cm이며, 너비는 10cm입니다.
크리스는 호신 기능, 무언가를 자르는 본래 칼의 목적 이외에도 신에 대한 공물, 자신과 가족의 보호, 행운을 염원하는 부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왕족의 공식 행사에 의례용으로 사용되며, 전통 말레이 결혼식에서 신랑이 착용합니다.
항뚜아(Hang Tuah)
이 갤러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믈라카의 유명한 전사이자 제독인 항뚜아의 부조입니다.

스자라 믈라유 (Sejarah Melayu_말레이 연대기)에 의하면, 항뚜아는 1430년대에 태어났으며 말레이 왕국의 전통 무예인 실랏(silat)의 거장이었습니다. 이 부조 속의 항뚜아는 전통 말레이 예복을 갖추어 입고, 손에는 따밍사리(Tamingsari)라는 크리스를 들고 있습니다. 따밍사리의 7개의 물결 모양 칼날은 신비한 속성을 가진 여러 종류의 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소유자에게 무적의 힘을 준다고 여겨집니다. 항뚜아는 충성심, 용기, 술탄 만수르 샤(Mansur Shah)와 조국을 향한 끝없는 헌신으로 말레이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의 전설은 여러 문학 작품과 문화 공연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조 맨 위에 새겨진 “TA’ MELAYU HILANG DI-DUNIA”는 “말레이인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말레이인의 용기를 상징합니다. 항뚜아의 이야기는 충성심, 명예, 진실성과 같은 말레이 전통 가치를 강조하며, 역경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웅심을 고취시키는 전설로써 말레이 왕국 전역에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항뚜아에 대한 문학 작품들이 역사인지 전설인지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고대 말레이 왕국부터 현대 말레이시아에 이르기까지 항뚜아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현재에도 문학과 예술, 교육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말레이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다문화를 통합하는 상징으로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갤러리 C : 식민지 시기
갤러리 C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일본에 의해 450년 이상 지속되었던 말라야의 식민 시기를 보여줍니다. 각 식민 세력들이 가져온 문화는 현지의 언어, 음식, 건축, 사회적 규범 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지배(Portuguese Rule)

130년간 지속된 믈라카의 포르투갈 시대는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의 영향이 두드러지면서 믈라카에 사는 유라시안들의 신앙과 종교적 관행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요새, 교회 건설과 같은 중요한 건축 발전도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지어진 포르타 디 산티아고(Porta di Santiago_산티아고의 문)와 세인트 폴 교회(St. Paul’s Church)는 현재까지 남아 포르투갈 시대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포르투갈 정착민들이 현지 여성과 결혼하면서 포르투갈-유라시안 공동체인 크리스탕(Kristang)이 탄생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포르투갈어, 말레이어, 영어가 혼합된 크리스탕어를 사용합니다. 믈라카의 포르투갈 문화 유산의 핵심인 피에스타 산 페드로(Fiesta San Pedro), 인트루두 페스티벌(Intrudu Festival)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축제 기간이 되면 포르투갈 춤을 추고, 징클리 노나(Jingkli Nona) 같은 현지 노래를 부르며 공동체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지배(The Dutch Rule)
네덜란드의 지배 기간 동안, 믈라카는 상당한 문화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향신료 무역과 식민 통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지역의 건축, 언어, 일상 생활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네덜란드 건축의 영향은 믈라카에 남아있는 스타더이스(Stadthuys) 건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뭇잎, 대나무, 석류 모티브가 그려진 이 VOC청화 백자 접시는 믈라카를 포함한 네덜란드의 모든 식민지에서 VOC 회사의 선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접시는 VOC의 브랜드와 임직원들의 권력을 상징했습니다. 정교하게 조각된 이 나무 안락의자는 네덜란드와 자바의 예술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꽃과 나뭇잎, 독수리와 같은 우아한 모티브가 새겨져 있고, 등받이와 앉는 부분은 이 지역의 라탄이 사용되었습니다.
붕아 마스(Bunga Mas)

붕아 마스(Bunga Mas)은 말레이 장인이 고품질의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식용 꽃입니다. 클란탄(Kelantan_말레이 반도 북부 주), 뜨릉가누, 끄다, 파타니(Pattani_현재 태국의 영토가 된 말레이 술탄국)의 술탄들은 3년 마다 시암(Siam_현재 태국) 왕에게 우정의 상징, 시암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붕아 마스를 선물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통해 말레이 국가들은 시암과의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고,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끄다는 1906년에 마지막 붕아 마스를 시암의 왕에게 보냈습니다. 1909년 3월, 영국과 시암이 방콕 조약에 서명하면서 말라야 북부 술탄국들(파타니와 세툴은 제외)의 주권은 영국에게 넘어갔고, 이 지역의 외교와 경제적 지형이 바뀌었습니다.
영국 지배(British Rule)

영국은 말레이 술탄국들과 공식적인 협정과 조약을 통해 법률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말레이시아가 영연방 법체계를 채택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현재 민주주의 체제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인 관리와 군인의 가족들이 더위를 피해 쉴 수 있도록 높은 산 위에 휴양지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곳이 프레이저 힐(Fraser’s Hill)입니다. 시원한 산 공기 속에서 영국 차(tea)를 스콘이나 딸기와 함께 즐기는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인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입니다.
축구 경기(Football match at the second Durbar, Kuala Lumpur, 1903)
영국 식민지 시기 초기에 테니스, 크리켓, 골프, 축구, 경마와 같은 스포츠와 레크리에이션이 들어왔습니다. 19세기 후반까지 스포츠는 소수의 유럽 엘리트 계층을 위한 전유물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생계를 꾸려가기 바빴고, 부유한 중국인들은 여가시간에 도박을 하거나 아편을 피우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말레이인들은 세팍 타크로(sepak takraw_공중에서 라탄 공을 차는 게임)나 레슬링, 연 날리기를 즐겼습니다.

축구는 도입 초기부터 인기 있는 학교 스포츠였으며, 현재 말레이시아에도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입니다. 1903년 쿠알라 룸푸르에서 열린 두 번째 두르바르(Durbar_통치자 회의)에서 빅토리아 학교 팀과 쿠알라 룸푸르 팀이 축구 경기를 치렀습니다. 이 사진에는 20세기 초 말라야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다문화적, 다민족적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이 사진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으며, 식민지배의 영향과 지역 전통이 어떻게 합쳐져서 쿠알라 룸푸르의 문화적 풍경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석 채굴-주석 동물 화폐(Tin minig-Tin Animal Monney)

주석으로 된 동물 화폐는 말레이 반도에서 사용된 최초의 화폐였습니다. 15세기부터 왕실이 왕족에게 주는 선물로, 채굴을 막 시작한 광산에서 주술적 의식을 치를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중에는 페락, 슬랑오, 느그리슴빌란에서 화폐의 형태로 발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주석 동물 화폐는 단단한 주석 덩어리로 만들며, 형태로는 거북이, 메뚜기, 수탉, 악어, 코끼리 모양이 있었습니다. 표준화된 화폐가 없던 시기에 교환 매체로써, 광산 주변의 지역 사회와 무역상인들의 거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고무(Rubber)
천연 고무는 산업 초창기부터 말레이시아 경제의 핵심이었으며, 국가의 번영에 이바지했습니다. 고무 산업은 헨리 리들리(Henry Ridley)가 브라질산 야생 고무 나무 씨앗을 말라야에 가져오면서 시작되었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산업이 되었습니다.
고무 산업 하면, 어떤 사람들은 새벽녘에 고무 나무들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손전등에 의지해 고무를 채취하는 노동자들을 떠올립니다. 러버 태퍼(Rubber tapper)라고 불리는 이 노동자들은 고무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무 나무(Hevea brasiliensis_브라질 헤베아)에서 채취된 우유 빛깔의 생 라택스는 특별한 용기에 보관되었습니다. 고무를 채취할 때는 고무 나무 표면에 정밀하게 흠집을 낼 수 있게 고안된 그레디(geredi)라는 칼을 사용하는데, 이 칼은 현재에도 소규모 고무 농가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코코넛과 쌀(Coconut and Rice)

코코넛과 쌀은 말레이시아의 문화와 일상에서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코코넛과 쌀은 소득의 원천이면서 환대의 상징이고, 문화적 행사나 관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코코넛으로 만든 코코넛 밀크, 팜 슈가, 코코넛 오일 등은 말레이와 페라나칸 요리의 필수 재료입니다. 또한 종교적 행사에 코코넛을 바치기도 합니다. 타이푸삼(Thaipusam_힌두교 행사)에서는 코코넛을 부수는데, 이때 코코넛은 자아를 상징합니다. 자아를 깨뜨리는 것은 우리 안의 영적인 순수함을 드러내는 겸손의 행위입니다.
쌀은 말레이시아의 주식이며, 많은 요리와 문화적 전통의 핵심 요소입니다. 쌀은 말레이시아의 모든 민족들이 즐겨 먹기 때문에 국가 정체성을 통합하는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코코넛 밀크로 만든 밥인 나시 르막(nasi lemak)을 함께 나누는 공통의 경험은 가족과 친구들 사이의 사회적 유대감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이렇듯 쌀은 주식인 동시에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을 상징하며, 말레이시아의 경제, 요리, 사회, 문화적 구조의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갤러리 D : 현재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의 다문화적 환경은 무역과 이주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고대 유적지들부터 현재의 고도화된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말레이시아는 무역과 이민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말레이시아의 인구 구성은 식민지 시기에 있었던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으며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주석 채굴이나 고무 플랜테이션 같은 노동 집약적인 산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영국은 인도와 중국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말라야 반도로 데려왔습니다. 말라야 반도에 들어온 숫자보다는 덜하지만, 사라왁과 영국령 북 보르네오(사바)로도 이주 노동자들이 들어왔습니다. 말레이시아 연방의 창설뿐 아니라 이러한 이주와 정착으로 인해 다양한 언어, 관습, 신념, 종교를 가진 다민족 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교육과 언어(Education & Languages)

Ethnologue(세계 언어 정보 사이트)에 의하면 말레이시아에서는 약 14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헌법 152조는 말레이어를 국어로 규정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거나(공식적인 목적 이외에는),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금지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국가 교육 시스템이 처음부터 표준화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는 잘 확립되어 있습니다. 공교육은 말레이어로 이루어지지만, 이민 인종들의 모국어인 만다린과 타밀어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 자위 문자를 사용하여 말레이어를 가르치는 학교, 이반어(Iban_사바, 사라왁 원주민 언어)로 교육하는 학교들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사립학교와 국제학교들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사들이 로탄(rotan)이라는 길고 가는 막대기를 이용해 학생들을 훈육했는데, 이때는 체벌이 일반적인 시대였습니다.
말레이시아인은 다양한 방언을 사용합니다. 말레이어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북쪽에서 남쪽, 동쪽에서 서쪽 간에 지역적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어는 표준 한자를 쓰지만, 출신 지역에 따라 만다린어, 호키엔어, 광둥어, 하카어, 하이난어 등 다양한 방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인도계들도 마찬가지로 힌디어, 벵골어, 툴루구어, 말라얄람어, 펀잡어 등을 사용합니다. 방송과 신문 매체들은 이러한 다양성을 반영하여 말레이(영어 알파벳이나 자위 문자 사용), 영어, 만다린, 타밀어로 된 신문을 발행하며, TV나 라디오 채널은 다양한 방언으로 된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종종 한 문장 안에 여러 언어를 섞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를 애칭으로 망글리쉬(Manglish) 혹은 ‘로작(rojak_말레이식 샐러드)’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용어들이 원래의 의미와 약간 다르게 사용되지만, 현지인들은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통신(Communications)

교육을 통해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신문과 방송 매체들도 많아졌습니다. 신문들과 기타 간행물들은 여러 언어로 발행되었습니다. 말레이 저널리즘의 성장은 말레이인들이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웠으며, 민족주의 투쟁을 고취시켰습니다.
라디오 방송은 조호, 쿠알라 룸푸르, 페낭의 아마추어 무선 동호회의 방송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34년, 페낭의 무선 동호회가 말레이어, 중국어, 타밀어, 영어로 방송을 시작했으며, 1946년에 라디오 말레이시아가 설립되었습니다. TV방송은 1963년에 제한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78년에 컬러 TV가 도입되었습니다.
사회(Society)

해외 유학은 세계 각지의 민족주의 운동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사나 작가, 종교기관에서 활동하면서, 말라야인들의 정치의식과 민족주의를 촉진시켰습니다. 자치를 열망한 말라야인들은 정당들을 결성하였고, 연합 정당(Alliance Party)은 자치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선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풀뿌리 운동을 주도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성들은 누군가의 집이나 부엌 같은 사적인 공간에서 독립 투쟁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습니다. UMNO(United Malays National Organisation_말레이 연합 국가 기구)같은 정당은 여성부서를 따로 두고, 선거 기간 동안 가정 방문을 하며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여성들은 가정과 사회의 전통적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반식민지 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신념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은 무기를 들었고, 어떤 사람은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말라얀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_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게릴라 전쟁)가 선포된 1948~1960년 동안, 반란 진압을 위해 많은 조치들이 실행되었습니다. 홈 가드(Home Guards_주민들로 구성된 보조 방위군)가 설립되고, 국가 신분증이 도입되었으며, 많은 수의 신흥 마을(New Villages_정글 주변에 거주하며 게릴라에게 우호적인 중국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마을)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사회 운영방식을 만들었습니다.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뜻하는 고통 로용(Gotong-royong_상호 협력)의 정신은 모든 공동체들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행사나 축제 준비를 위해, 혹은 상을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지역사회가 함께 나서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말라야의 다양성 축제(Merdeka-Celebrating Malaya’s Diversity)

말라야의 독립이 선포되는 역사적 행사에 참석한 말레이 통치자들은 모두 전통 예복을 입었습니다. 최고급 전통 직물로 만든 기품 있는 예복을 입고, 텡콜록(tengkolok_전통 머리장식)을 쓴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1957년 메르데카(Merdeka_독립) 행사는 말라야인의 다양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양한 민족 공동체들이 춤과 노래, 공연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를 선보였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보석을 착용한 각 주의 술탄부터 무대 의상을 입은 공연자까지, 모든 사람들이 말라야가 가진 문화적 다양성을 화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축하 공연으로는 방사완(bangsawan_전통 말레이 오페라), 사자 춤, 아식 춤(asyik_클란탄과 파타니의 궁중 무용), 인도 춤, 포르투갈 후손으로 구성된 트레스 아미고(Tres Amigos)의 노래 등이 있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주들(The States of Malaysia)

말레이시아 여러 주들의 깃발과 문장(emblem)을 보면 그 주가 무엇으로 유명한지 알 수 있습니다. 보통 그 주의 역사, 문화, 자연을 상징하는 꽃이나 동물 혹은 대표 농작물 등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술탄이 있는 일부 주들은 다룰(Darul_~의 집이라는 뜻)로 시작하는 아랍어 존칭이 붙으며, 사바와 사라왁은 ‘~의 땅’과 같은 존칭이 있습니다. 큐브들을 뒤집어서 각기 다른 이름들을 확인해보세요.
전통 복장(Common Threads)

이 10명의 인물들은 각 공동체의 다양한 전통 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민족들마다 특정한 전통 의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민족의 의상을 입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혼혈인 사람들도 종종 있기 때문에 외모로 어떤 인종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왼쪽부터
- 바지 위에 한푸/마구아(Hanfu/Magua_만다린 칼라가 달린 중국식 긴 튜닉)를 입고 있습니다. 이 의상은 치파오(qipao_중국 여성의 전통의상)의 남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사롱(sarong_긴 치마 형태로 허리에 두르는 옷) 위에 바주 끄바야 라부(Baju Kebaya Labuh_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긴 블라우스 형태의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 페락 공주 의상을 입고 있는데, 사롱 대신 바지를 입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지 위에 샘핑(samping_허리에 두르는 천)을, 어깨 위에 슬른당(selendang_스카프)을 두르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 푸아 직물(pua_이반족의 전통 직물)로 만든 이반족 전사의 의상을 입고, 코뿔새 털로 장식한 머리 장식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 타밀나두(Tamil Nadu_인도 남부지역) 스타일의 사리(sari_인도 여성의 전통의상)를 입은 모습니다. 짧은 블라우스, 속치마, 6m 길이의 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천으로 몸을 감싼 후 한쪽 어깨 너머로 넘겨서 늘어뜨립니다.
- 송켓으로 만든 바주 끄바야 펜덱(Baju Kebaya Pendek)을 입고 있습니다. 짧은 바주 끄바야란 뜻으로 엉덩이를 덮는 길이입니다.
- 중국식 치파오를 입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몸에 꼭 맞는 긴 형태입니다.
- 카다잔두순 페남팡(KadazanDusun Penampang_사바의 토착민족)의 전통의상을 입고, 시가(siga)라고 불리는 천을 접어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 클란탄의 여왕이었던 치크 시티 완 끔방(Cik Siti Wan Kembang)의 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크리스를 들고 있습니다.
- 클란탄의 남성 통치자가 주로 입는 상의인 맹간(Mengan)과 아체(Aceh_수마트라 섬의 북부지역) 스타일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믿음과 종교(Beliefs & Religions)
말레이시아는 다양한 민족의 명절과 종교 기념일을 공휴일로 선포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커뮤니티로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사바와 사라왁의 원주민, 바바뇨냐, 치티, 오랑 아슬리, 펀자브인(Punjabi_인도 북서부 출신), 세라니(Serani_포르투갈 혼혈), 시암인(Siamese_태국 샴족), 등이 있으며 이들은 이슬람, 힌두교, 시크교(Sikhism), 기독교, 카톨릭, 도교, 불교, 토착 신앙과 같은 종교를 믿습니다.
주요 명절과 그에 따른 인사말을 소개합니다.
| 명절 | 인사말 |
| 하리 라야 아이딜 피트리(Hari Raya Aidil Fitri) : 이슬람의 명절로 한 달간의 라마단(Ramadan_금식월)이 끝나는 것을 기념 | 슬라맛 하리 라야 아이딜 피트리 (Selamat Hari Raya Aidil Fitri) : 행복한 하리라야 아이딜 피트리 |
| 하리 라야 아이딜 아드하(Hari Raya Aidil Adha) : 이슬람 명절로 아브라함이 알라의 뜻에 복종하여 아들 이스마일을 희생한 것을 기념 | 슬라맛 하리 라야 아이딜 아다(Selamat Hari Raya Aidil Adha) : 행복한 하리 라야 아이딜 아다 |
| 디파발리(Deepavali) : 힌두교, 시크교, 자이나교 같은 인도 종교에서 기념하는 빛의 축제 | 디파발리 발투갈(Deepavali Valthugal) : 행복한 디파발리 |
| 음력 설날(Chinese New Year) | 꽁시파차이(Gong Xi Fa Cai) : 번영을 빕니다. |
| 까아마딴(Kaamatan) : 사바의 추수감사절 | 꼬토비안 따다우 따카조 도 까아마딴(Kotobian Tadau Tagazo Do Kaamatan) : 행복한 까아마딴 |
| 가와이(Gawai) : 사라왁의 추수감사절 | 가유 구루, 그라이 냐마이(Gayu guru, Gerai nyamai) : 장수, 건강, 번영을 빕니다) |
| 바이사키(Vaisakhi) : 시크교의 추수 감사절 | Happy Vaisakhi : 행복한 바이사키 |
이러한 축제를 통해 다양한 공동체의 문화(특히 요리)를 경험하고, 그들의 종교와 관습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