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셀프 가이드 투어

국립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투어를 통해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말레이 왕국들과 식민지 시기를 거쳐, 현재 말레이시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말레이시아 역사의 단편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1) 벽화들
박물관 건물 정면에는 말레이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이태리산 유리 모자이크로 표현한 두 개의 거대한 벽화가 있습니다. 이 벽화는1962년, 다툭 쳉 라이 통(Datuk Cheong Lai Tong)이라는 작가가 말레이시아의 초대 수상인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이 개최한 응모전에서 수상을 한 후 만들었습니다. 동쪽 벽화의 제목은 ‘말라얀 역사의 장면들’이고, 서쪽 벽화는 ‘말라얀 공예품들과 장인’입니다. 말레이시아를 ‘말라얀(Malayan)’이라고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말레이시아’라는 국가 명칭은 박물관이 완공된 직후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동쪽 벽화는 12세기 힌두-불교 말레이 왕국부터 말라야가 독립한 1957년까지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부터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 중국에서 정화(Cheng Ho)장군이 믈라카를 방문한 1409년을 볼 수 있습니다. 3명의 인물들이 이미 이슬람으로 개종한 믈라카 술탄에게 선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믈라카는 중국의 보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공물을 보냈습니다. 믈라카는 매우 성공한 중계항으로 발전했으며, 84개의 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1475년은 말레이 영웅 항투아(Hang Tuah)가 술탄의 명령을 받고 그의 친구 항자벳(Hang Jebat)을 물리친 장대한 크리스(keris) 전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511년, 포르투갈은 수익이 많이 나는 향신료 무역을 위해 믈라카를 공격하여 차지하고, 1641년 네덜란드에게 빼앗길 때까지 번성하는 중계항을 지배했습니다. 네덜란드는 1824년까지 믈라카를 지배했습니다. 믈라카 마지막 술탄의 아들은 조호(Johor) 왕조를 세웠습니다. 1720년경, 부기스(Bugis)가 조호에 밴다하라(Bendahara) 왕조를 재건했습니다.

1820년에 시암(Siam)에게 정복 당했던 크다(Kedah) 술탄국은 1840년에 복원되었습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나무인 붕아 마스(bunga mas)를 시암의 왕에게 조공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한편, 주석에 대한 영국의 개입이 증가하였으며, 페락(Perak)에서 발생한 중국인 주석 광부 비밀 결사(secret society)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1874년, 팡코르(Pangkor)조약으로 두 파벌 간의 평화가 찾아왔고, 주석 무역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또한 압둘라 왕자를 페락의 합법적인 술탄으로 인정함으로써 승계 갈등을 해결했습니다. 이 조약의 결과로, 술탄이 가지고 있던 국정 운영의 역할을 처음으로 영국이 차지하게 됩니다.  

1886년, 슬랑오(Selangor)에 최초의 정부 철도가 건설되면서 추가 투자 기회들이 열리게 됩니다. 1900년까지 고무 농장들이 생겨났으며, 고무는 주석과 더불어 1980년대까지 국가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던 1941년, 경제발전을 위해 고무나 주석과 같은 원자재가 필요했던 일본은 말라야를 공격했고 이후 4년 간 점령했습니다. 전쟁 이후, 자유에 대한 열망이 일어났으며, 새로운 국가 말라야는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2) 로비

박물관의 정문으로 들어오면 높은 개방형 로비가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박물관 앞과 뒤쪽 벽면에 세로로 길게 나 있는 창문들의 일부는 투각된 나무 패널로 돼 있어 실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게 합니다.

홀의 앞부터 뒤까지 늘어진 천장의 나무 들보를 살펴보면 복잡하게 조각된 장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식은 중앙의 들보에서 서까래까지 계속됩니다.

뒤쪽 벽에 있는 장엄한 계단은 둘로 갈라져 있는데, 양쪽 모두 위층의 갤러리로 연결됩니다. 로비의 바닥에는 파란색과 흰색의 기하학적 무늬의 타일이 있는데, 이는 박물관이 개관하던 1963년에 파키스탄이 기증한 것으로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상적입니다.

“유리를 쓰지 않은, 상자 갑 모양이 아닌(No glass, no boxes)”은 1958~1963년까지 초대 박물관장을 지낸 탄 스리 무빈 쉐파드(Tan Sri Mubin Sheppard)의 박물관 디자인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말레이시아 박물관은 반드시 뭔가 지역적인 특색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건축가 호 콕 호에(Ho Kok Hoe)는 알로 스타(Alor Star)에 있는 1735년에 지어진 크다 술탄의 대연회장(Balai Besar)을 참고하여 박물관을 디자인했습니다. 국립박물관은 그 당시 유일한 정부 건물로,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를 위해 전통적인 말레이 건축 양식을 반영하여 설계되었습니다.

이 갤러리에서는 수렵 채집 시기부터 초기 정착까지 인류의 여정과,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도구의 유형들, 신앙, 관습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딥 스컬(Deep Skull)

딥 스컬은 화석화된 인간 두개골로 1958년 말레이시아 사라왁(Sarawak)주의 니아(Niah)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두개골은 약 35,000~45,000년 전 동남아시아에 살았던 현생 인류의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다른 유해들보다 더 깊은 땅 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딥 스컬이라고 불립니다.

이 두개골은 길쭉한 모양, 가파른 이마, 탄탄한 모습이 특징적입니다. 두개골의 크기와 모양으로 보아 젊은 성인 여성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딥 스컬은 동남아시아 초기 인류의 물리적 특징과 진화 역사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에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입니다

딥 스컬에 대한 논의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두개골 변형(cranial deformation)”이라는 관습에 의해 모양이 변형되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개골 변형’은 유아기나 아동기 때 의도적으로 두개골 모양을 바꾸는 문화적 관습으로, 천이나 판자로 머리를 묶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머리에 압력을 가해서 만듭니다. 이러한 관행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미학적인 혹은 사회적 이유에 의해 행해졌을 수 있습니다. 딥 스컬은 인류 진화 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물이며, 역사 전반에 걸쳐 인류 다양성을 입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구석기부터 신석기까지 도구의 진화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까지 도구 진화의 특징은 인류의 독창성과 혁신이 서서히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구석기 시대 초기 인류는 사냥과 도축, 음식 가공을 위해 찍개나 긁개, 손도끼 같은 단순한 석기들을 사용했습니다.

발견된 중요한 석기 유적지 중 하나는 페락 주의 코타 탐판(Kota Tampan)에 있습니다. 이 석기 작업장은 74,000년 전에 있었던 수마트라(Sumatra)의 화산 폭발로 인해 버려졌기 때문에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류는 창, 활과 화살, 어망과 같은 복잡한 도구들을 만들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인류는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교한 석기 발전과 구리, 청동, 철과 같은 금속의 사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 도구의 진화는 초기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고,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경험한 필요와 도전을 반영합니다.

코디앙 삼발 토기(Kodiang Tripod Vessel) 

크다 주, 코디앙(Kodiang)의 구아 버할라(Gua Berhala) 유적지에서는 많은 도자기 잔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연구를 통해 어떻게 원뿔형 도자기를 만들고 장식하는지, 굽는 조건과 같은 기술적 측면이 자세히 밝혀졌습니다.
새로운 조각들의 발견은 이 원뿔형들이 삼발 토기의 일부이라고 추론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삼발 토기의 다리에 있는 구멍이 언뜻 보기에는 용도를 이해할 수 없고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구멍들은 도자기를 구울 때, 내부의 빈 공간에서 공기가 빠져 나올 수 있도록 고안되었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삼발 토기들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페락맨(Perak Man)
페락맨은 1991년, 페락 주의 릉공밸리(Lenggong Valley)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사람의 유해입니다. 약 11,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골은 조각난 두개골과 턱뼈, 치아 그리고 척추와 팔, 다리, 손의 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페락맨은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된 가장 완전한 형태의 구석기 인류 유골 중 하나입니다.  

페락맨의 시신은 동서 방향으로 동굴 입구와 수직이 되는 곳에 1미터 정도 깊이로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왼쪽 팔과 손이 짧은 선천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40~45세까지 살았는데,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오래 산 편이었습니다.

정성을 들인 매장 방식을 봤을 때, 페락맨은 부족 내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이자 높은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페락맨의 발굴은 동남아시아의 인류 진화와 이동 패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뚤랑 마와스(Tulang Mawas)
뚤랑 마와스는 소켓이 있는 긴 손잡이의 철도끼입니다. 동물의 갈비뼈를 닮은 모양이 특징이며 오직 말레이 반도에서만 발견됩니다. 뚤랑 마와스는 “유인원의 뼈”라는 뜻으로, 이는 한때 숲에 살았던 철로 된 손을 가진 고대 유인원인 뚤랑 마와스 전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는 민담일 수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이 전설이 이 도구를 사용하는 숲에 사는 어느 종족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은 청동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오래가며, 추출하기가 쉽습니다. 실제 철은 가장 풍부한 금속으로 단순 제련에 적합하며, 퇴적물 표면에 넓게 퍼져 있어 정교한 채굴 과정 없이 긁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뚤랑 마와스는 페락, 파항(Pahang), 슬랑오 주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발견된 종류로는 긴 손잡이 도끼, 끌, 칼, 창의 촉 등이 있으며, 이들은 연장의 한 부분이라고 추정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도구인지 무기인지 궁금해합니다. 기본 모양은 식별이 가능하지만, 현재 모든 도구들이 녹으로 변형되고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용도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마도 뚤랑 마와스는 다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철 제품이 비쌌기 때문에 철 도구를 소유하는 것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 한정되었을 것입니다.

부장밸리(Bujang Valley)의 돌 조각품들
크다 주에 위치한 부장밸리는 동남아시아 무역과 문화 교류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했으며, 이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고고학적, 역사적 유물들에서 각 종교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찬디(candi)라고 불리는 사원의 잔해들에서 힌두교와 불교 이미지의 혼합을 볼 수 있습니다. 조각상들은 신의 장대한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습니다.

힌두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1957년 크다 주의 바투 린탕(Batu Lintang)에서 발굴된 석판이 있는데, 드바라팔라(Dvarapala)라는 힌두의 춤추는 인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된 드바라팔라는 힌두교와 불교 문화에서 수호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원이나 신성한 장소의 입구에 동상이나 조각의 형태로 배치하곤 합니다.

불교의 영향은 테라코타에 새겨진 보살좌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유물은 펭칼란 부장(Pengkalan Bujang)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보살좌상은 깨달음과 해탈이라는 불교도의 목표를 표현하는 불교 미술의 인기 있는 소재입니다. 보살좌상의 자세로 명상을 함으로써 우리는 평온함, 연민, 지혜와 같은 자질을 기를 수 있습니다.

갤러리 B에서는 2~16세기 사이에 말레이 월드라고 불리는 말레이 군도에 설립되었던 왕국들과 술탄국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말레이 월드는 문화적 특성들과 역사, 문화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해양 동남아시아를 말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말레이 월드는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부터 이스터 제도(Easter Islands)까지를 아우르지만, 이 갤러리에서 중점을 두는 곳은 현재의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Borneo)입니다.

말레이 반도에 있었던 고대 말레이 왕국들의 흔적들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하면, 말레이 왕국들은 이미 2세기부터 보르네오, 수마트라, 자바(Java), 술라웨시(Celebes), 몰루카스(Moluccas), 인도차이나의 일부 지역에 존재해왔었습니다. 예를 들어, 크다 투아(Kedah Tua), 혹은 카타(Kataha), 치-차(Chieh-Cha)라고 불리는 왕국은 5세기, 어쩌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크다의 부장밸리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 곳이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중 하나가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7세기의 마카라(makara)입니다. 마카라는 코끼리와 물고기의 모습이 조합된 신화적 생물로 깜풍 숭아이 마스(Kampung Sungai Mas)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장밸리에서는 기둥의 주춧돌들도 발견이 되었는데, 이 지역에 산재되어 있던 힌두-불교 사원들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종합적으로 이러한 유물들은 크다 투아에 존재했던 힌두-불교 문화를 알려줍니다.

역사적 기록들 역시 한때 말레이 반도에 존재했던 왕국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페락 주의 강가느가라(Gangga Negara), 뜨릉가누(Terengganu) 주의 폴로안(Foloan), 클란탄(Kelantan) 주의 치투(Chih Tu), 싱가포르의 트마식(Temasik)과 같은 왕국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힌두-불교
인도 문화는 고대 동남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졌습니다. 힌두교와 불교, 산스크리트어, 인도식 정치 체계가 유입되었으며, 기존의 토착 전통과 신념과 결합하여 힌두-불교라는 이 지역 특유의 하이브리드 문화가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혼합주의는 말레이시아에서 발굴된 종교적, 예술적 유물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전시되어 있는 관음보살상(Avalokitesvara)은 힌두-불교 혼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다른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열반에 드는 것을 미루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불상은 강가느가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강가느가라는 8~9세기에 존재했던 불교 왕국으로 11세기 촐라(Chola)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청동상은 힌두교 파괴의 신인 시바(Shiva)와 관련된 특징들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독특합니다. 그 특징들로는 높은 왕관, 물병, 허리에 두른 호랑이 가죽을 들 수 있습니다. 페락 주의 비도르(Bidor)에서 발견되었으며, 무게는 63Kg, 높이는 93cm입니다.

스리비자야(Srivijaya) 스타일로 만들어진 자롱 브라민(Jalong Brahmin) 혹은 부다 브라민(Buddha Brahmin) 청동상은 베다(Veda)의 현자, 아가스티야(Agastya)입니다.

아가스티야는 힌두교 전파와 최초의 타밀어 문법책인 아가티얌(Agattiyam) 편찬, 실라밤(Silambam)이라는 무술을 창시한 공로로 높이 숭배되고 칭송되는 인물입니다

믈라카(Melaka) 건국
믈라카 왕국의 초기 역사는 팔렘방(Palembang)의 왕자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가 정착지를 만든 14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그는 시암 왕국의 속국이었던 트마식의 지배자를 살해했기 때문에, 그의 최우선 과제는 안전과 생존이었을 것입니다. 시암은 복수를 하려고 했고, 믈라카는 그가 숨기에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파라메스와라는 주어진 기회를 현명하게 포착했습니다. 그는 그 지역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바다 집시들과 해안가 주민들과 협력하여 믈라카를 기항지로 개발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믈라카는 서서히 입지를 굳혀나갔으며, 결국에는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파라메스와라가 중국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보호와 지원을 얻자, 시암과 마자파히트(Majapahit)의 위협은 감소했습니다. 그 대가로 중국에 사절단과 공물을 정기적으로 보내서 황제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믈라카는 상업적 허브로 번성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핵심은 무역의 법적 기반이 되는 운당운당 라웃 믈라카(Undang-Undang Laut Melaka)라는 해상법을 엄격히 실행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운당운당 믈라카(Undang-Undang Melaka)라는 법이 있었는데, 이는 말레이 월드의 최초의 법률로 믈라카 행정의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다양한 주민들에게 신뢰와 확실성을 제공했습니다.

난파선들에서 발굴된 도자기들

해저는 과거의 난파선들이 잠들어 있는 조용하고 경이로운 안식처입니다. 난파선 발굴을 통해 국지적으로 형성된 무역로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10세기부터 이 무역로를 통해 다양한 커뮤니티들이 무역에 참여했습니다. 말레이시아 연안에서만 14척의 난파선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갤러리에서는 투리앙(Turiang) 난파선(1370년 경), 롱취안(Longquan) 난파선(1400년 경), 슈안데(Xuande) 난파선(1540년 경)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발굴된 물건들은 다양했습니다. 예를 들어, 투리앙은 중국 저장성의 유명한 롱취안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대량의 청자와 접시들을 운반했으며, 롱취안은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청자 접시, 꽃병, 컵 등을 운반했습니다. 또한 슈안데에서 나온 청화 도자기와 태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시대의 도자기 트랜드(도자기의 기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재료나 스타일)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무역을 통해 이루어진 지역간 도자기 생산과 소비 패턴을 연대순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도래
믈라카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는 2번째 술탄인 메가트 이스칸다 샤(Megat Iskandar Shah)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으로, 이로 인해 믈라카는 이 지역의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15세기 중반까지 믈라카의 대부분이 이슬람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디오라마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번성하고 있는 경제에 이슬람화가 더해지면서 믈라카는 무슬림 상인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믈라카는 이슬람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이슬람 사상과 지식의 중심이 되었고, 지역 예술과 사회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믈라카, 하이브리드 사회
믈라카 세계주의(cosmopolitanism)에 기여한 핵심 요인은 국제 항구로서의 믈라카의 명성이었습니다. 말레이 군도 전역과 시암, 버마, 중국,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지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무역만 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믈라카에 정착하고 로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공통어는 말레이어였지만 믈라카의 전성기에는 84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상인들, 인도 상인들, 포르투갈 정착민들의 후손인 바바뇨나(Baba Nyonya), 치티 믈라카(Chetti Melaka), 크리스탕(Kristang) 커뮤니티들이 15~16세기에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페라나칸(Peranakan)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들의 문화는 기존의 말레이 문화와 매끄럽게 결합되어 일상적이면서도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의 뛰어난 문화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도자기, 장신구, 전통 복장과 같이 이들이 사용했던 일부 아이템들은 이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믈라카는 믈라카 해협에 자리잡은 전략적 위치 덕분에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효율적인 행정,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 향신료 무역 독점, 이슬람으로의 개종으로 믈라카는 번성하는 중계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믈라카는 외세의 표적이 되었고, 1511년 포르투갈에 함락되면서 말라야의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440년이 넘는 식민 시대는 말라야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르투갈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자 육로를 통한 향신료 무역은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려워졌습니다. 1494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맺은 토르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믈라카가 위치한 동쪽으로 대체 항로와 식민지들을 모색했습니다. 이는 제국을 확장하고 부유한 믈라카를 정복하려는 그들의 의도와 잘 맞았습니다.

포르투갈 왕은 수익성이 좋은 향신료 무역을 위한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디아고 로페즈 세퀴에라(Diego Lopez de Sequeira)가 이끄는 사절단을 믈라카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사절단은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현지에서 저지른 위법 행위와 더불어 포르투갈이 믈라카에 오기 전, 인도에서 무슬림들을 적대적으로 대했던 것들이 알려지면서 믈라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1511년, 포르투갈 왕은 알폰소 알부케르크(Alfonso de Albuquerque )가 이끄는 18척의 배와 1,000명의 군사를 보내 믈라카를 함락시키고 130년을 지배했습니다. 포르투갈 식민지 정책의 목표는 글로리(Glory), 골드(Gold), 가스펠(Gospel)로, 무역만이 아니라 무역과 사람들 그리고 땅을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새의 캡틴이 믈라카를 운영하고 공무와, 재정, 종교적 문제들을 관리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을 위해 밴다하라(Bendahara), 트만공(Temenggong), 샤반다(Shahbandar) 제도는 유지하였으며, 캡틴을 보좌하게 했습니다. 믈라카가 함락되자, 믈라카의 왕가는 파항으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조호와 리아우(Riau)에서 새로운 말레이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네덜란드 통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인 VOC(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는 회사-국가로서 군대를 보유하고 지역 지배자와 조약을 체결하며 방대한 식민지들을 운영했습니다. 그들의 무역 중심지는 바타비아(Batavia_현재의 자카르타)에 있었습니다. VOC는 해상 무역로와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고, 다른 세력들이 네덜란드와 경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믈라카를 점령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수많은 공격을 시도했으며, 마침내 1641년에 조호 술탄국과 다른 동맹들의 도움으로 믈라카를 점령하고 183년 간 지배했습니다. 믈라카의 네덜란드 행정부를 이끄는 수장은 총독(governor)이었습니다.

영국의 점령
영국은 인도와 중국 간 동서 무역에 참여하기 위한 거점을 말레이 반도에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 동서 무역의 주요 품목에는 차(tea), 아편처럼 수익성이 높고 새로 유행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말라야에 대한 영국 개입은 18세기 말, 영국 동인도 회사가 무역항들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791년에 프란시스 라이트(Francis Light)가, 1819년에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가 각각 페낭과 싱가포르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해 크다의 술탄과 조호의 족장과 협상했습니다. 1824년, 앵글로-더치(the Anglo-Dutch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은 믈라카를 차지하고, 수마트라의 벤쿨룬(Bencoolen)은 네덜란드에게 양도했습니다. 1826년, 페낭, 싱가포르, 믈라카는 행정적으로 통합되어 해협정착지로 불리게 되었고 말라야 반도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시작되었습니다.   

팡코르 조약(The Pangkor Treaty)
영국은 싱가포르와 페낭의 안정과 자유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1874년 팡코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지역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실의 술탄 계승 분쟁과 주석 광산을 장악한 두 중국계 비밀결사간의 갈등은 영국이 그들의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말레이 술탄국들의 정부를 조직하고 지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1874년, 페락의 왕자 압둘라(Abdullah)와 앤드류 클락(Sir Andrew Clarke)은 팡코르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압둘라 왕자는 페락의 합법적인 술탄으로 인정받았으며, 그 대가로 술탄은 종교와 말레이 관습을 제외한 모든 국정을 담당하는 영국인 레지던트(Resident_영국인 통치자)를 받아들입니다.

버치(JWW Birch)가 말라야의 첫 번째 레지던트가 되었으며, 페락의 뒤를 이어 슬랑오, 파항, 느그리 슴빌란(Negeri Sembilan)도 레지던트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 4개 국가들은 나중에 연방 말레이 국가(Federated Malay States)를 형성하게 됩니다.

영국 개입이 원자재에 미치는 영향
영국이 말레이 국가들의 행정에 개입하면서 큰 발전과 진전이 있었습니다. 경제에 있어 주석과 고무산업과 같은 원자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정부는 도로, 철도, 기반시설, 통신, 교육, 그리고 정부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주석 채굴은 말라야의 가장 오래된 산업으로 믈라카 술탄국 시절부터 이루어졌습니다.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통조림 식품 산업이 발달하면서 주석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중국인들이 주석 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왔습니다. 주석 수요가 증가하면서 채굴방식은 ‘람판(lampan_냇물로 토양을 씻어내는 방식)’에서 ‘롬봉(lombong_주석을 함유한 흙을 파내 세척 상자에 넣어 분리)’으로 발전하였고, 나중에는 유럽 회사들이 준설기를 도입하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20세기부터 말라야는 주요 주석 생산국이 되었습니다.

한편, 말라야 고무 산업은 1878년 쿠알라 캉사르(Kuala Kangsar)에 첫 번째 고무나무가 심어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헨리 리들리(Henry Ridley)가 환금작물로 고무를 소개했고, 말라야는 천연고무의 주요 생산국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해소하기 위해 인도인 이민자들을 데려와 고무 농장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일본의 점령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주석, 고무, 식량이 더욱 필요해지자 일본은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삼게 됩니다. 영국이 유럽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1년 12월, 일본은 영국령 말라야를 침공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일본의 공격에는 자전거가 이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자전거를 가져오고, 지역 주민들과 소매상들로부터 구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자전거는 정글과 농장을 통과할 때 높은 기동성을 발휘해서 적들을 놀라게 하는데 매우 유리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군대가 코타 바루(Kota Bahru)에 상륙했고, 싱가포르와 보르네오를 점령하기까지 68일이 걸렸습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은 항복했습니다.

이 갤러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1941년 일본의 침공으로 영국의 지역민 보호 능력은 신임을 잃었습니다. 이는 말레이 민족주의 부흥에 기여했으며, 독립에 대한 요구는 염원이 되었습니다. 영국이 전후 말라야에 돌아오면서 독립을 향한 새로운 도전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민족주의에서 국가로
식민 통치 하에서 말라야 경제는 고무와 주석과 같은 상품들로 인해 크게 성장했습니다. 정부의 규모와 역할도 확대되었습니다. 경제와 정부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현지 출신의 숙련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현대 교육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대중적인 영어 교육을 도입했습니다.

폰독(Pondok), 오두막 학교가 시골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교육은 종교 교육에 중점을 둔 비공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초기 말레이 민족주의는 중동에서 교육을 받은 범이슬람(Pan-Islamic) 활동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언론인들과 교육자들도 이들로부터 독립에 대한 생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인들과 더불어 종교학자들도 그들의 저술을 통해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말레이 민족주의의 전환점은 1946년 4월 말라얀 연합의 출범이었습니다. 모든 시민들에게 동등한 권리가 주어지고, 말레이 통치자들이 주권을 상실하자 영국 정부는 거센 반대에 직면하게 됩니다. 따라서 말라얀 연합은 1948년에 말라야 연방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연방 하에서 시민권 규정은 엄격해졌으며, 통치자들의 주권은 회복되었습니다. 

독립과 그 이후로 가는 길
영국 보호령 하에서 말라야 연방이 창설되자, 전쟁 당시 영국과 함께 싸웠던 말라얀 공산당은 결국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1948년 6월, 공산주의자들은 무장 투쟁을 시작했고, 이에 영국은 말라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비상사태는 196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비상사태 기간 동안,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억제하기 위해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제한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영국의 굴레에서 말라야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막기 위한 해결책은 독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말라야 인종들의 단결 없이는 독립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955년, 말레이 국가 단체 연합(UMNO), 말라얀 중국인 협회(MCA), 말라얀 인도인 회의(MIC)로 구성된 동맹당이 첫 번째 연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동맹당은 52석 중 51석을 휩쓸면서 주요 인종들이 협력해서 일할 수 있고, 독립이 우려하는 내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 승리로 말라야의 독립은 쉽게 협상되었으며 1957년 8월에 합의되었습니다. UMNO의 리더 툰쿠 압둘 라만이 독립 말라야 연방의 초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1957년 8월 31일, 툰쿠 압둘 라만은 메르데카(Merdeka_독립) 스테디움에서 메르데카를 반복하여 외쳤습니다.
이 독립의 외침은 기념비적인 행사를 목격하기 위해 참석한 2만 명이 넘는 말라야 사람들에 의해 열정적인 메아리로 울려 퍼졌습니다. 이 날은 1511년 포르투갈의 침략 이후 446년간의 외세 지배가 끝난 날입니다.

1961년 5월 27일, 툰쿠 압둘 라만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있던 싱가포르, 북보르네오(사바 Sabah), 사라왁(Sarawak), 브루나이(Brunei)를 통합하여 말레이시아를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연방 가입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북보르네오와 사라왁 주민들의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코볼드 위원회(The Cobbold Commission)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보르네오와 사라왁 인구의 80%가 연방 가입을 지지했습니다. 브루나이는 가입을 철회했습니다.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가 창설되었습니다. 관련국들의 합의로 말레이시아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창설 초기에는 반대가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1966년까지 말레이시아에 대한 대립 정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리핀은 사바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으며, 1964년에야 말레이시아와의 외교적 관계를 다시 수립했습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된 후, 1965년 8월 9일에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와 연방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국가의 국가 상징들
새로운 국가, 말레이시아는 고유의 국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우리의 군주제, 국가, 국기, 국장, 국화가 포함됩니다. 이는 발전을 추구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갈 말레이시아 국민의 힘과 용기, 단합을 상징합니다.  

1) 왕실 머리장식, 텡콜록 디라자(Tengkolok Diraja)

전통적 말레이 머리장식인 텡콜록은 천으로 만들어지며, 다양한 모양과 스타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왕실 머리장식은 술탄들과 말레이시아 최고 통치자인 양 디 퍼투안 아공(Yang Di-Pertuan Agong)이 착용하는 말레이 왕족의 의례용 복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공은 5년마다 9명의 술탄 중에서 선출됩니다. 왕실 머리장식은 느그리 슴빌란 주의 스타일로 접고 묶어서 만드는데, 최초의 아공인 투안쿠 압둘 라만(Tuanku Abdul Rahman)이 이 주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2) 국가, 느가라쿠(Negaraku)
말레이시아 국가는 ‘로잘리(Rosalie)’라는 세이셸(Seychelles)의 프랑스계 크리올(creole) 노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 섬에 유배를 갔던 페락의 술탄, 라자 압둘라가 매우 좋아했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페락 주의 노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뜨랑 불란(Terang Bulan)’이라고 불리며 인기 곡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열망과 희망을 강조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 국기, 잘루어 그밀랑(Jalur Gemilang)
국기는 국가의 리더쉽, 명예, 존엄성, 주권의 상징입니다. 말레이 문화에서 국기는 왕실 통치자의 지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1997년 8월 31일 저녁, 당시 총리였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Tun Dr. Mahathir bin Mohamad)는 말레이시아 국기의 새 이름인 잘루어 그밀랑(영광의 줄무늬들)을 발표하면서 또 다른 역사적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총 14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줄무늬는 13개의 주들과 연방지역을 나타냅니다. 왕실의 색인 노란색으로 초승달과 별이 표시되어 있는데, 초승달은 국교인 이슬람을 상징합니다.

14개의 꼭지를 가진 별은 다시 한번 13개의 주들과 연방지역을 상징합니다.   

4) 국가 문장, 자타 느가라(Jata Negara)
말레이시아 국가 문장, 자타 느가라는 1952년 5월 30일, 말레이 통치자들이 합의한 말라야의 상징입니다. 이 문장은 5가지 요소 : 방패, 2마리 호랑이, 노란색 초승달과 14개 꼭지를 가진 별, 배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상징은 영국 식민시기 연방 말레이 국가(Federated Malay States)의 문장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문장은 유럽의 문장 디자인과 비슷하며, 모든 주들을 상징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5) 국화, 붕아 라야(Bunga Raya)
붕아 라야, 히비스커스는 말레이시아의 국화입니다. 1960년, 초대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이 붕아 라야를 국화로 선포했습니다. 이 꽃은 국민들의 용기와 활력을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 하나의 마음 
말레이시아는 색들과, 향들, 소리들, 광경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독특한 나라입니다.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이 나라는 1957년 독립 이후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매년 말레이시아인들은 라마단 마지막 날인 하리 라야 아이들피트리(Hari Raya Aidilfitri), 음력 새해, 빛의 축제인 디파발리(Deepavali), 사바의 카다잔 두순족(Kadazan Dusun)들의 타다우 카마탄(Tadau Kaamatan_추수 축제), 사라왁 다약족(Dayak)의 하리 가와이(Hari Gawai_추수 감사제) 등의 축제를 기념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 축제들, 전통들, 관습들의 아래에는 말레이시아인의 정신이라는 동일한 정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과거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실증적이며, 다층적이고, 종종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투어가 선사시대부터 말레이 왕국들, 식민지 시대를 거쳐 현재 말레이시아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말레이시아 역사의 단편들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지역명과 고유명사는 모두 말레이어 발음으로 표기되었습니다.